지난해 전체 살인 및 살인미수 4건 가운데 1건은 현재 또는 과거 배우자와 연인, 사실혼 관계의 ‘친밀한 파트너’를 상대로 발생했다는 경찰 통계가 처음 나왔다. 경찰이 피의자와 피해자 간 관계를 바탕으로, 배우자 등 친밀한 파트너 관계에서 발생한 살인범죄 규모를 파악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나 친밀한 파트너에게 살해당하거나 당할 뻔한 피해자들의 성별은 별도로 구분하지 않았다. 전세계적으로 살해당하는 여성 대부분은 남편이나 연인 같은 친밀한 파트너로 인해 목숨을 잃는 경향이 확인되지만, 한국 상황을 드러내는 정부 통계는 여전히 빈칸이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소병훈 의원(더불어민주당)이 경찰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19일 보면, 2023년 살인범죄(미수 포함) 피의자는 모두 778명으로 그중 192명(24.6%)은 전·현 배우자와 전·현 애인, 사실혼 배우자를 상대로 범행을 저질렀다. 피해자가 끝내 목숨을 잃은 살인 사건 피의자는 289명으로 그중 83명(28.7%)이 배우자를 비롯한 친밀한 파트너를 살해했다. 이들에게 목숨을 잃은 피해자는 배우자(43명)와 전 배우자(2명), 사실혼 배우자(9명)였다. 애인(25명)이나 전 애인(4명)을 살해한 교제살인도 29건이었다. 살인 미수 피의자 489명 가운데 109명(22.2%)도 배우자(45명), 애인(23명), 전 애인(19명), 사실혼 관계(17명), 전 배우자(5명)를 죽음의 위기로 몰아넣었다.
경찰은 그동안 살인 등 형사사건 피의자 기록(피의자통계원표)을 작성할 때 피해자와의 관계를 15종(국가, 공무원, 고용자, 피고용자, 직장 동료, 친구, 애인, 동거 친족, 기타 친족, 거래 상대방, 이웃, 지인, 타인, 기타, 미상)으로 분류해왔다. 그러나 이런 기준만으론 가정·교제폭력 및 살인 등 피해자가 주로 여성인 ‘친밀한 파트너 관계에서 발생하는 범죄’ 규모를 파악하는 데 한계가 뚜렷했다. 비판이 이어지면서 경찰은 2023년부터 피의자와 피해자 간 관계 분류 기준에 △전·현 배우자 △사실혼 △전 애인 등을 추가하고 동거 및 기타 친족 항목을 세분화했다.
이렇게 관계 분류 방식이 바뀌었지만 전·현 배우자나 연인에게 살해당하거나 당할 뻔한 여성 피해자 숫자는 집계되지 않았다. 전체 살인범죄 피의자·피해자 성별은 구분돼 있으나 친밀한 파트너 관계에서 발생한 살인 피의자·피해자의 성별 분리는 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유엔(2020년) 자료를 보면, 전세계적으로 살인 피해자 80%는 남성이지만 친밀한 파트너 관계에서 발생한 살인 범죄만 따로 보면 피해자 80%가 여성이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나타나는지 확인하고 필요한 예방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첫걸음은 성별 분석이지만 관련 정부 통계가 여전히 없다.
이에 대해 경찰청 관계자는 “현재 (수사 정보 등을 입력하고 필요한 데이터를 산출하는) 형사사법정보시스템(킥스)에선 피의자와 피해자 간 관계 분류 뒤 관계별로 피해자와 가해자의 성별을 구분하는 교차 분석이 가능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지난 2009년부터 해마다 언론에 보도된 ‘친밀한 관계의 남성에 의한 여성 살인(미수 포함)’ 건수를 취합해 발표해 온 한국여성의전화 송란희 대표는 “이전엔 범죄자와 피해자 관계 자료가 부실해서, 이번엔 성별 자료가 부실해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한 여성 살인 규모를 파악할 수 없다”며 “경찰이 여성 피해 규모를 알리고 싶지 않아 반쪽 통계만 공개하는 것 아니냐”고 비판했다. 최란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도 “친밀 관계 내에서 주로 어떤 성별이 죽임을 당하는지를 알 수 없다면 (이런 범죄의 원인으로 지목돼 온) 성별 고정관념이나 왜곡된 성문화에서 비롯될 수 있음을 밝히고 예방책을 마련하는 일은 불가능해진다”고 지적했다
소병훈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특정 사회 현상에 대한 통계 집계 여부와 집계 방식은 통계의 작성 주체가 그 현상의 심각성을 인지하는 정도를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 지표”라며 “범죄자와 피해자의 관계를 세부적으로 분류해놓고 정작 성별을 확인할 수 없는 건 반쪽짜리 고도화”라고 지적했다.
최윤아 기자 ah@hani.co.kr,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